
Samhain festival?
클랑 (@0c08a210b115415)
"그.러.니.까! 삼하인이라고 푸른 악마가 사는 곳을 아세요?"
"뭐라고? 하인이 악마라고?"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비비, 암만 지나도 여기서 더 나아질 거 같지 않은데 차라리 저 노인네의 머리를 이 망치로 살짝 쳐보자. 그럼 고쳐질지도 모르잖아?"
"뭐 하러 고쳐?. 그냥 나한테 맡겨주면 머릿속을 알아봐 줄게"
옆에서 한스와 카이드락이 자신이 나서겠다고 말하자 나는 그들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이젠 울고 싶다. 어째서 나는 이런 곳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걸까?
내 이름은 블랙 보이. 용사를 꿈꾸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이제는 평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게 한때 이 세상을 관리했던 나이아이며, 전쟁이 끝난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평화를 위해 주구장창 노력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젠 모든 힘든 일이 끝났으니 평화만 있을 줄 알았는데...
모든 일은 그래, 약 2주 전 트리타에서의 일을 끝내고 오랜만에 달콤한 휴식을 만낀하던 차에 자연스레 한스와 카이드락이 쳐들어와 실랑이를 벌일 때였다.
"심심해! 놀아줘! 비비!"
"계속 방안에만 있는 거 심심하지 않아? 놀러 가자!"
"시끄러워! 지금 우편물 확인하니까 조금만 조용히 좀 해줄래?"
찡얼대는 두 녀석들을 무시하고 봉투를 열자 그곳에는 익숙한 글씨체가 나를 반겼다.
'이곳에 정착한지 이제 약 한 달 정도 되었구려. 이곳은 내 고향과 달리 사시사철 푸른 잎사귀가 난 나무들과 깨끗한 호수가 있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오. 그러나 맛있는 케이크라도 딸기가 없으면 부족한 법. 지금 당장이라도 그대에게 달려가고 싶으나 유감스럽게도 이곳에선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소. 허나 며칠 뒤 10월 31일. 매년 그날은 이곳에서 축제를 연다고 하니 부디 그대가 와준다면 이 축제는 아름답고도 위대한 모습에 무한한 영광이 뒤따를 것이오. 그러니 나이아여. 그 축제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오'
"이 편지는 삼하인이 보낸 편지네. 다행이다. 이 행성에 정착하신다고 들었을 때는 솔직히 걱정도 들었는데 무사히 지내시는 거 같아"
"삼하인이라면 그 파란 악마? 그 녀석도 참 징글징글하네. 이제 전쟁도 끝냈겠다 귀찮기만 하는 악마는 버리는 게 어때?"
"아앗! 멋대로 보면....."
"축제? 그거라면 말이 다르지. 당장 가자!"
멋대로 내 손에서 편지를 채간 한스의 말에 이쪽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카이드락이 소리쳤다.
"우리 축제 가는 거야? 신난다! 그날은 뭐 하고 놀지? 머리 위에 사과를 올리고 칼 던지기? 산성 호수에 다이빙하는 걸 보는 것도 즐거울 거야"
"아직 간다고 말 안 했거든! 거기다 축제에서 그런 뒤숭숭한 걸 할 리가 없잖아"
힘껏 소리쳤지만 듣는 척도 안 하는 두 녀석들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머리가 아파왔지만 솔직히 오랜만의 휴식인데 친구들과 놀러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였다. 한스와 카이드락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언제나 내 곁에서 많은 힘을 보태준 친구들이였다. 지금은 이렇게 한가롭지만 사실 그들은 각각 한 나라의 왕들이라 나이아인 나만큼이나 바빠서 평소에는 셋이 모이기는 커녕 따로 만나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이였다. 그러니 한가로워지자마자 쳐들어 온 게 이해가 되었기에 나도 말로만 소리칠 뿐 진심으로 이 두 녀석들을 내쫓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시작된 우리의 여행은 밤안개와 낯선 지리에 의해 길을 헤메고, 해가 뉘엇뉘엿해 질 쯤에서야 간신히 지나가던 어르신을 만나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 분의 귀가 많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곤란에서 벗어난 거 맞겠지....?
"악마가 하인이라니 거 참 신기하구먼 그래"
"비비, 역시 여긴 내가...."
"....차라리 글로 써서 보여드리는 게 빠르겠어"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올리려는 카이드락을 저지하고, 나는 재빨리 이제는 거의 무 쓸모에 가까운 지도의 한구석에 삼하인,축제를 적어 앞에 내보였다. 얘들아, 제발 사고 치지 말아 줘..
"어디 보자....아아! 여길 말하는 거였나? 서하인 축제!"
"저 노인네, 발음도 이상한 거 같은데?"
이젠 대놓고 삿대질하는 한스의 손가락을 내리며 나는 어르신의 다음 말씀에 집중했다.
"아 그거라면 이쪽으로 큰 바위가 나올 때까지 걸은 후 오른쪽으로 가면 금방이란다"
다행히 한스의 말은 들리지 않았는지 어르신은 아무렇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숲의 어느 방향을 향해 손짓하셨다. 친구들의 태도와 상반되게 친절히 가르쳐 주시는 어르신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정말 덕분에 살았어요"
"쳇, 재미없게. 내가 끝내주는 고문 방법 알아왔는데 써보지도 못했어"
"카이드락, 너는 진짜....죄송합니다. 이 녀석들의 말은 무시해 주세요. 덕분에 축제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비, 어차피 말귀를 알아먹지도 못할 텐데 너무 열심힌거 아냐? 뭐 그래도 도움이 되었어. 고마워"
한스의 예의 없는 말에 내가 뭐라고 하려던 순간 어르신의 분위기가 낮아지더니 어딘가 진중한 얼굴을 지으셨다.
"10월 31일은 이승과 저승의 문이 열리는 날이지. 원래 그날은 사악한 악령들을 속이기 위해 분장하며 불을 밝히는 날이였어. 그러니 조심하게. 문이란 한쪽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니"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던 찰나 어르신은 이젠 나도 할 일이 있다며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선 떠나가셨다.
"대체 뭐였을까? 마지막 그 말씀은?"
"신경 쓰지 말고 갈 길이나 가자. 악령이든 뭐든 영혼이 이곳에 올 수 있다면 누가 부활 마법을 쓰겠어?"
왠지 그 어두운 분위기가 신경 쓰여 말을 더 건네려 했지만 카이드락의 재촉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혹시 우리의 태도가 맘에 드시지 않으셨던 걸까? 어쩐지 몸이 으스스한 거 같은데 착각이겠지?
[Samhain festival]
"어...여기가 정말 맞는 걸까?"
판넬 하나만 딸랑 붙어있는 허름한 입구에 순간 똑같은 이름의 축제가 두 개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거기다 삼하인의 이름이 붙어있는 축제라니. 정착한지 별로 안되었다고 들었는데 벌써 축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잘 지내시는 건가? 우리를 깜짝놀래키기 위해 무슨 축제인지는 가르쳐 주지 않은 걸지도 몰라.
"와~ 진짜 허름하네. 우리 성의 창고 입구도 이것보단 호화로울 거 같아. 거기다 저기 텅 비어 있는 곳은 원래 사람이 앉는 곳인가? 관리자 하나 없다니 이미 축제고 뭐고 망한거 같아"
"이게 뭐야...축제라길래 기대했는데 다 낡아빠졌잖아. 거기다 축제 이름이 삼하인 축제? 차라리 돌아가서 우리끼리 노는 게 더 재밌겠다"
비아냥 거리는 카이드락과 실망으로 돌아가자는 한스를 보며 솔직히 나도 돌아가고 싶었으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삼하인을 떠올리곤 참았다.
"그러지 말고 일단 한번 들어가 보자. 기껏 초대해 주셨는데 아무 말 없이 돌아가기엔 그렇잖아?"
"에...저기 울타리는 아예 부서져 있는데? 저기선 불이라도 났나? 탄 자국도 있어"
"이런 게 축제라면 세상 모든 축제한테 사과해야되"
".....일단 들어가자"
여기 오자고 한 건 너희들이잖아!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경험상 말해봤자 귓 등으로도 듣지도 않고 내심 나도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기에 묵묵히 한스와 카이드락의 등을 밀며 나는 판넬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
..
-....어딨어?
"오, 안쪽은 그럴 듯 한걸? 밤이라서 그런지 길거리마다 등불이 있어"
"비비! 저길 봐. 저 애의 손짓에 따라 동물들이 움직이고 있어. 마법은 아닌 거 같은데 이능력일까? 갖고 싶다"
"축제 컨셉이 변장인가 봐. 모두 가면을 쓰고 신기한 옷들을 입고 있어. 우리만 이런 차림으로 와도 되는 걸까?"
허름한 입구와 다르게 본격적인 축제가 진행되는 광장은 공연과 신기한 옷차림의 사람들, 그리고 많은 상점과 체험부스에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그런데 음식점은 보이지 않네? 보통 축제에는 먹거리가 많지 않나?
의문도 잠시 다람쥐와 새 같은 다양한 종류의 소동물을 부리는 작은 키의 나무 가면, 입에서 거대한 물줄기를 토해내는 덩치 큰 광대, 물구나무를 한 채 발로 불타는 공을 저글링 하는 근육질의 하얀 하키 가면 등 수많은 볼거리에 정신을 빼앗겼다.
"저 하키 가면은 <13일 밤의 금요일>의 제이슨이잖아! 공보다는 전기톱이 더 어울릴 거 같은데 내가 가져다줄까?"
"....그 쪽보다 저기는 어때? 가면을 써서 틀릴 수도 있지만 아이 같아. 저런 아이의 손짓에 동물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게 신기하지 않아?"
"저기 저 뱀은 게으름 피우고 있는 거 같은데? 아무것도 안하고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이잖아. 저렇게 있는 거 보면 확실히 똑똑하긴 하네. 일 안 하고 혼자 놀고 있잖아"
"검은색 뱀이라니 멋지다. 나도 저런 이능력이 있으면 저런 뱀과 교감할 수 있을까? 진짜 갖고 싶다. 잡아먹으면 가질 수 있으려나?"
한층 더 위험한 말을 내뱉는 카이드락에 기겁할 때쯤,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너희들! 이쪽으로 와봐"
"카이드락! 누가 우리를 부르고 있어. 혹시 삼하인일지도 모르니까 가보자"
"별로 시간 걸리지 않을 거 같은데 후딱 먹고오면 안될까?"
"절. 대. 안. 돼"
"쳇"
"어이~, 내 말 들리고 있지? 혹시 귀가 없어서 못 듣는 거 아니면 이쪽으로 이제 와줄래?"
눈이 갸름해진 카이드락과 한스를 데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다양한 가면을 전시한 상점 안쪽에서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 이쪽이야"
"무슨 일이신가요?"
까마귀 가면은 과장된 몸짓으로 대충 우리를 잠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멍청이들을 보았나. 설마 너희 그 꼴로 들어온 거야?"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요?"
삼하인에게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만 들었지. 정확히 무슨 축제인지는 듣지 못한 터라 혹시라도 큰 실례를 저지른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당연하지! 대체 경비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녀석들을 들여보내다니......뭐, 이 기회에 악성 재고나 팔아볼까"
잠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까마귀 가면은 이내 뒤쪽에서 가면 3개를 가져와 우리에게 보였다.
"하지만 걱정 마라! 가면을 챙기지 못한 너희들을 위한 상품이 여기 있으니! 이 가면만 있으면 너희들도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될 거야"
자애로운 신관처럼 두 팔을 활짝 펼친 까마귀 가면은 카이드락한테는 노파 가면, 한스한테는 귀가 큰 녹색 괴물 가면, 나에게는 푸른 말 가면을 주었다.
"뭐야 이거 못생겼잖아. 이런 걸 누가 써?"
녹색 괴물 가면을 보고 찡그린 한스의 말에 까마귀 가면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뭘 모르는군. 그 가면은 무려 기계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그렘린이라 불리는 요정이지. 그 옆의 친구는 바바야가라고 불리는 희대의 마녀이며, 이 친구의 가면은 물속을 자유자재로 달리는 명마 중의 명마! 켈피다"
까마귀 가면은 그와 관련된 전설 몇 가지를 말해준 후 손가락 3개를 우리에게 펼쳐 보였다.
"이런 전설의 가면을 무려 이 가격에 너희들에게 제공 해주지. 어떠냐? 이런 가격으로는 어디에서도 가면을 구할 수 없다고? 그야말로 가여운 너희들을 위한 특가 중의 특가지"
"가자. 비비"
"나도 아까 보던 거나 보고 싶어"
가면을 내버려 두고 가려는 한스와 카이드락의 모습에 까마귀 가면은 기겁했다.
"아니, 너희 정말 가면 없이 가려고? 제정신이야? 아니 가면이 없으니 제정신이 아니겠군. 잘 생각해 봐라. 그렇게 영혼이 노출된 상태에서 나돌아다니면.....?!"
알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린 까마귀 가면은 갑자기 흠칫 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재빠르게 가게에서 나와 내 눈을 쳐다봤다.
"너는....이곳에 있어선 안된다. 썩 나가라"
아까의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매섭게 노려보는 까마귀 가면에 친구들이 얼굴을 굳히며 다가왔다.
"이젠 갑자기 시비 거는 거야? 대신 까마귀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딱 봐도 우리한테 바가지 씌우려는 게 보이는데 안되니까 협박하는 꼴이 웃기네. 우린 그딴 가면에 낭비할 돈은 없거든"
한스의 말에 까마귀 가면은 재빨리 다시 친구들에게 가면을 나눠주고 나한테는 직접 가면을 씌워주며 말했다.
"절대! 어떤 일이 있더라고 그 가면을 벗으면 안 돼. 알겠어? 무사히 여길 나가고 싶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수칙이야. 젠장, 그 녀석은 뭐 하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게 놔둔 거야. 게으름 피울 녀석은 아닌데..."
"저...돈은?"
"필요 없어. 너희들, 내가 다녀올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서 딱 기다려야 해"
멋대로 말해버리곤 까마귀 가면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대체 뭘까? 혹시 우리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른 걸까?"
"비비! 가면도 받았겠다. 우리마저 축제나 즐기러 가자. 나 아까 동물쇼 다시 보고 싶어"
"신경 쓰지 마. 여기 대마왕도 있고 너랑 나도 있는데 뭔 일 당하겠어? 저딴 녀석은 무시하고 가자. 어차피 이것도 속임수일지도 모르잖아? 귀찮은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
"내 말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에휴, 그래 간다. 가"
멋대로 가기 시작하는 카이드락을 쫓으며 나는 아까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속임수 같지는 않았는데 괜찮은 걸까?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사과해야겠어. 혹시 모르니 한스와 카이드락한테는 가면을 벗지 말라고 해야겠다.
"사라졌잖아! 다시 보고 싶었는데 너무해. 그 까마귀 녀석 때문에 괜한 시간을 낭비했어"
우리는 다시 그 장소로 돌아가 봤지만 나무 가면의 동물쇼는 사라지고 웬 순무 가면...이 아닌 진짜 눈 코 입을 판 순무를 쓴 사람과 화난 표정과 슬픈 표정의 호박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있었다.
"공연은 이쯤 보고 우리 체험부스에 가는 건 어때? 아까 엄청 재밌어 보이는 걸 발견했는데 나랑 같이 하자. 비비"
"그래. 카이드락도 다른 걸 하다 보면 기운이 날지도 모르니까"
"딱히 저 녀석의 기분은 상관없지만 말이야. 히히"
상심한 카이드락을 데리고 이동하려 할 때쯤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만 실례할게. 너희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고양이 가면을 쓴 남자가 우물쭈물 한 태도로 서있었다.
"이번에는 또 뭐야? 우리 바쁘니까 빨리 말해줄래?"
"그 검은 뱀 다시 보고 싶었는데..."
"저 무슨 일이신가요?"
내심 속으로 아까의 일과 관련된 일일까 걱정하던 차에 고양이 가면이 말을 이었다.
"그게...내가 사람을 찾고 있거든. 혹시 이만한 사람 보았어? 아니다. 이만할 수도 있겠다"
손을 자기 머리 위에 올리는가 하면 바로 무릎까지 내리는 고양이 가면을 몸짓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범위의 오차가 너무 큰 거 같은데요"
"몸길이를 줄였다 늘렸다 하는 거야? 그럼 마족인가? 카이드락도 크기를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잖아"
"만약 그런 스프링 같은 종족이 있다면 보고 싶네"
"그 애는 그런 종족이 아니야. 다만 무슨 모습일지 몰라서..."
"찾고 있는 녀석의 생김새도 모르다니 이상한 녀석이네"
"저희도 이곳에 온 지 별로 안된 터라 도움을 드리긴 어려울 거 같아요"
나의 말에 상심한 듯 고양이 가면은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분 이름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고양이 가면이 또다시 우물쭈물 한 태도로 손가락을 꼬았다.
"그...그건"
"프라우잖아. 또 그 이상한 사람 찾기 놀이를 하는 거야?"
아까 보았던 순무와 호박을 쓴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순무 가면(?)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고양이 가면은 욱하고 말했다.
"놀이가 아니야! 나는 정말 애타게 찾고 있다고!"
"키가 80센티 였다가 180센티이기도 하고 찾으려는 사람의 이름도 못 말하는 게 뭐가 애타게 찾고 있다는 거야? 매년 이러는 거 지겹지도 않냐?"
"...그건 이유가 있어서"
"이유든 뭐든 찾으려면 말을 하던가. 우리가 여기로 나온 게 장난도 아니고"
순무 가면의 말에 화난 호박 가면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밭에 있는 순무 뽑아다가 머리에 뒤집어쓴 수전노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아"
"뭐? 불만 밝히면 됐지. 거기서 더 뭘바래? 너야말로 <크리스마스의 악몽>에 나오는 '잭 스켈링턴'이라도 된 줄 알아? 넌 그런 스타가 아냐. 호박의 왕은 커녕 그냥 길가의 호박 같은 존재라고"
"흥, 내가 이 축제를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데. 머리에 불을 붙인 채로 이 검을 박으면 축제의 주인공은 바로 내가 될걸!"
"자자, 너무 흥분했어. 얘들아, 진정하자. 이제 우리 공연을 할 시간인데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지. 저...프라우씨도 누굴 찾으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분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저도 공연하면서 혹시라도 프라우씨가 찾는 분으로 생각되는 분을 발견하면 알려드릴 테니 이 친구의 무례는 용서해 주세요"
슬픈 호박 가면이 순무 가면과 화난 호박 가면을 중재하며 고양이 가면에게 사과를 건넸다.
"비비, 슬슬 지겨운데 우리 다른 데로..."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가 분위기가 풀어지자 카이드락이 질린다는 듯 말을 하던 그때. 고양이 가면이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찾는 애는 바로....에이커스 호스로프야"
순간 이 자리의 시간이 멈춘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적막이 들었다.
"에이커스...호스로프? 뭐야 '너도' 였냐?"
"어?"
고양이 가면이 반응하기도 전에 순무 가면은 뒤집어 쓰고 있던 순무를 벗어버리고 그 안의 모습을 우리에게 비췄다.
"저, 저게 대체 뭐야?"
순무 가면의 머리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상처가 가득했으며 무엇보다 정수리 쪽에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 끔찍한 모습에 당황한 나는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그 다음 말에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전부 에이커스의 작품이야. 정보를 캐내겠다고 내 머리를 이 꼴로 만들었지. 이 두 녀석도 모두 마찬가지로 에이커스한테 당했지. 프라우, 너도 에이커스한테 당한 거냐?"
"아냐! 틀려. 내가 찾는 건 너희가 아는 그 에이커스가 아냐. 나는 살인마가 아닌 귀여운 나의 아이를 찾고 있는 거라고!"
"아?...아이라고?"
"젠장, 이럴까 봐 이름을 못 말했던건데. 그래, 나 '에이커스 프라우'와 '커티스 호스로프'의 아이 말이야!"
그 말에 순무 가면은 고양이 가면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에이커스' 프라우라고? 너 이 자식! 에이커스의 혈육이었구나! 잘 만났다. 네놈을 얼굴도 이렇게 갈아엎어 주마!!"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던 나는 서둘러 순무 가면의 팔을 잡았지만 팔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센 거야?
"저리 비켜!"
한 번의 몸짓으로 튕겨져 나온 내가 바닥에 쓰러지자 거대한 망치가 순무 가면을 향해 겨누어졌다.
"현재 있는 머리도 완전히 잃어버리고 싶어? 감히 누구를 친 거야? 너희들끼리 지지고 볶는 건 상관 안 하겠는데 비비를 건드리면 안 되지"
"저리 꺼지라고 했잖아!"
순무 가면은 여전히 고양이 가면을 허공에 매단 채 다른 손으로 망치를 잡았다. 한스가 바로 망치를 휘두르려 했으나 힘이 부족한지 망치는 약간의 떨림만 있을 뿐 여전히 순무 가면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뭔 힘이 이렇게 센 거야? 애초에 불만이 있으면 직접 에이커스를 찾아가던가. 여기서 한심하게 원망만 해대는 꼴이 웃겨서 말도 안 나온다"
"...한심하다고?"
"그래! 엄청 한심하지. 뭣하면 에이커스 보고 이쪽으로 오라고 할까? 지금은 내 밑에 있거든. 내가 바로 왕궁에서 제일 높은 분이니까!"
도발에 분노한 순무 가면이 한순간 틈을 보이자 한스는 두 손으로 망치를 잡고 있는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순무 가면을 힘에 밀려 각도를 벗어난 망치는 순무 가면이 아닌 그 옆에서 있던 슬픈 호박 가면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한스! 무슨 짓이야. 여기서 사람을 죽이면 어쩌자는 거야?!"
"틀려. 머리를 날리는 감각이 없었어. 저거...처음부터 텅 비어있었다고!"
"그게 무슨....?!"
"일났다. 오르노프의 탈이 벗겨졌어! 이 바보 멍청아. 너도 후딱 순무 쓰고 얘 좀 어떻게 해봐"
오르노프라고 불린 슬픈 호박 가면이었던 자의 목 위는 돌 부스러기와 벌레들 몇이 아래로 떨어질 뿐 그 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아아....내 밑? 왕궁?
끼이익 까각 이상한 소리를 내며 관절이 뒤틀리는 괴이한 모습에 여기 있는 모두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화난 호박 가면에 의해 머리에 순무가 씌워지고 고양이 가면을 놓친 순무 가면 마저도.
-왕을 빼앗은 왕궁. 내 시체를 농락한 에이커스......으아아아아!!!
목이 없음에도 공기를 진동하며 괴성을 지르는 오르노프의 모습에 나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목이 없어. 거기다 시체라고?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10월 31일은 이승과 저승의 문이 열리는 날이지'
설마 이 모든 건?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말을 떠올린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카이드락이 앞으로 나섰다.
"꽤 재밌는 장면들이 많네. 특히 네 모습은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을 정도로 멋져. 하지만 아쉽게 되었네. 여기서 전부 사라질 테니까"
카이드락이 손을 들고 대마왕의 마력을 꺼내려 하자 나는 주위의 상황도 잊고 저놈부터 말리고 싶었다. 이 일대를 날려버리고 싶나? 말 한마디에 도시를 날린 그때를 떠올린 나는 끔찍한 비극을 막으려던 찰나. 카이드락은 무언가 '막힌 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쳐다보았다.
"마력을 꺼낼 수가 없어?"
-으아아아아!!
모두가 카이드락에 정신이 팔린 순간 오르노프는 차마 인간이 낼 수 없는 괴성을 다시 지르며 한층 거대해진 팔로 카이드락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카이드락!"
"비비! 지금은 일단 뛰어!"
목표물을 이쪽으로 바꾼 듯 오르노프가 다가오자 한스는 서둘러 나를 끌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이드락이..."
"저 녀석들이 모두 죽었다면 또 죽지는 않을 거 아냐. 카이드락은 나중에 찾고 일단 지금은 도망쳐야 돼"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카이드락을 잃어버리는 거야?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당장이라도 친구가 날아간 방향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몇 배나 커진 덩치로 쫓아오는 오르노프의 모습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카이드락의 무사를 바라며 나는 한스와 함께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향했다.
...
..
-...어디 있는 거야? 난 이곳에 있는데..
"아야야. 이 잡동사니가 쿠션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겠어"
카이드락은 주변의 나뭇가지와 부품 조각들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어디 다친데 없나 몸을 점검해 봤지만 쓰고 있던 노파 가면이 충격으로 헐렁해진 거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제는 거슬리기만 한 가면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카이드락은 그 자리에서 투덜거렸다.
"대체 어디까지 날아간 거야? 꽤 외곽 쪽으로 보이는데. 중간에 장애물이라도 있었으면 정말 위험했겠는걸. 그건 그렇고 아까는 왜 마법을 쓸 수 없었던 거지?"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손을 휘져서 보아도 무언가에 막힌 듯 마력이 몸 안에서만 돌 뿐 나오지않자 카이드락은 눈을 찡그렸다.
"쯧, 고대 노인네랑 소통도 안되고. 여긴 아슈마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인가? 설령 다른 행성이라고 해도 마력만 있다면 마법을 쓸 수 있을 텐데? 이대로 있으면 몸이 위험하니 일단은 주변을 살펴봐야겠어"
주변을 살펴보니 인파가 많던 광장과는 다르게 이곳은 반쯤 숲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나무와 풀이 가득했다. 숲과 다른 점이 있다면 등 뒤에 있는 커다란 오두막이 있다는 정도였다.
"잡동사니가 이렇게 널려있는 거 보면 저기는 창고인가? 흠, 몸을 지키기 위한 도구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흙과 먼지를 탈탈 털은 카이드락은 성큼성큼 창고로 보이는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여긴 왜 이렇게 어두워? 깜깜해서 잘 안 보이잖아. 뭔가 쓸만한 도구가...."
"크아악!....뜨거워. 너무 뜨거워"
갑작스레 들린 소리에 카이드락은 몸이 얼어붙었다. 최대한 숨을 죽이며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껏 어둠에 가려져 있던 무언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뜨거워. 아파. 미안해. 뜨거워. 뜨겁다고!"
창고의 한쪽 벽면에는 지금껏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나 의문이 들 정도로 거구의 무언가가 등을 보인 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차라리 죽여줘. 뜨거워. 죽고 싶지 않아. 살려야..."
'이거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녀석이 있네.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이런 녀석 따위 문제도 안되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몸을 피해야.....저건?"
살금살금 몸을 뒤로 빼던 카이드락은 거한의 옆에 걸려있는 정글도를 발견했다.
'저건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이 언데드가 된 이후 주력으로 사용했던 정글도잖아! 그런데 괜찮을까? 등을 돌렸다고는 해도 저 덩치가 나를 눈치채면 아까 같은 일이 벌어질 거 같은데'
카이드락은 슬픈 호박 가면이 폭주했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괴성을 질렀었지. 덩치도 좀 커졌었고. 저 녀석의 상태도 비슷해 보이는데 여긴 대체 뭘까? 머리 없이 돌아다가는 녀석부터 마법도 안 써지고 너무 이상해'
몇 가지 짐작되는 것은 있었지만 카이드락은 이내 생각을 털어버리곤 정글도를 가져갈 방안을 모색했다. 어차피 이곳이 어디든 자신은 그저 놀러 왔으며, 알아봤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축제를 즐기고 싶었을 뿐인데 진짜 귀찮네. 어디 보자, 저 녀석한테서 벗어난 다고 해도 또 다른 위험이 없을 거란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제이슨'의 물건이니 가지고 싶어'
향후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지금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카이드락은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정글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뜨거워. 뜨거워....반드시 죽일 테다. 절대로...절대 용서 못 해!!!"
손이 정글도에 닺는 순간 거한이 위를 향해 포효했고 덕분에 카이드락은 거한의 그 끔찍한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까맣게 보인 몸은 어둠 속이라 그렇게 보인 게 아닌 새까맣게 타서 그렇다는 것과 거한 또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카이드락은 급히 정글도를 집고 창고 밖으로 향했다.
-...마족?....또다시 뺏으러 왔어? 아아아아아!!
머리를 부여잡고 비통한 울음을 지른 거한은 이내 사나운 야수처럼 카이드락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냥 거기서 계속 울고 있지. 왜 쫓아오는 거야?!"
창고 문을 부숴버리고 맹렬히 쫓아오는 거한의 모습에 카이드락은 눈을 찡그리며 손안의 정글도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공격할까? 아냐, 물리력이 나쁜 나로선 정면공격은 무리야. 애초에 이건 몸을 지키기 위한 방어수단으로써 가지고 있으려 했지 공격하기에는 내 힘이 부족해'
-돌려줘! 돌려줘! 내 집도 내 가족도 전부 돌려줘!!
"누가 보면 내가 가해자인 줄 알겠어.....혹시 진짜 나인가?"
아까 머릿속을 스쳤던 가설이 맞는다면 저건 자신이 날려버린 도시 사람일 수도 있겠다며 카이드락은 혀를 내둘렀다.
'그냥 작은 불꽃놀이한 거 가지고 너무한 거 아냐?'
블랙 보이가 들었다면 기함할 생각을 하며 카이드락은 사람이 많은 광장을 찾아 달렸다. 용사라면 최대한 인명피해가 없도록 거한을 외각으로 유도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카이드락은 매우 이기적인 마왕이였다. 그는 사람들이 다치든 말든 일단 자신의 안전이 우선이였으므로 망설임 없이 광장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그에겐 유감스럽게도 주변엔 나무나 풀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대체 그 자식은 어디까지 날려보냈길래 광장이 안 보이는 거야?!"
슬슬 숨이 가파르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즘 카이드락은 나무에 걸려있는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저 뱀은 분명..."
"이쪽이에요!"
그때 수풀에서 작은 손이 튀어나와 카이드락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너는?"
"질문은 나중에 해주세요! 일단은 이쪽에 숨어계세요"
카이드락을 옆에 있는 수풀로 밀어 넣은 나무 가면을 쓴 아이는 자신 또한 나무 뒤에 숨어 숨을 죽였다.
-하아...하아....뜨거워. 불이. 불이. 으아아아아!!
목표물을 놓친 거한은 거센 불길이 지나고 잿더미만 남은 듯 크게 울부짖고는 땅에 없어져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지키지 못했어"
"없으면 다른 데로 가버릴 것이지. 왜 여기서 이러는 거야?"
"쉿!"
작게 투덜거리는 카이드락을 향해 나무 가면은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재스처를 보냈다.
"아아아....부디...만큼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음울한 중얼거림을 내뱉은 거한은 마지막으로 공허하고도 슬픈 울음을 흘리고선 어딘가로 향해 가버렸다.
"휴, 큰일 날뻔했네.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았어"
살며시 수풀에서 빼꼼 나와 상황을 살피던 카이드락은 거한이 사라지자 수풀에서 나와 지친 몸을 추슬렀다.
"대체 저건 뭐야? 축제에 놀러 왔는데 이상한 까마귀를 만나지 않나, 목 없는 녀석한테 날려지더니 이젠 쫓기기까지 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죄송해요"
"응? 딱히 너한테 한 이야기는 아니야. 오히려 네 덕분에 살았는걸. 정말 나이스 한 타이밍이였어"
"그건 어떤 분께 형이 위험하다고 들었거든요. 거기다 광장의 일도 이 애들한테 들었어요"
"이 애들?"
나무 가면을 쓴 아이는 주변을 작은 동물들을 가리켰다. 쥐부터 시작해 새, 토끼, 여우 등 평소라면 천적관계인 동물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 소년 주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건 이능력이야? 멋지네. 나도 동물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능력을 가지고 싶어"
"이능력은 아니예요. 저도 작년까지 이 애들과 같았기에 도움받는 것에 가까운걸요"
"같아...?"
아이의 말에 카이드락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작년까지 저도 이 얘들처럼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취할 수 없었거든요. 너무 어릴 때 죽거나 영혼이 심하게 다친 사람은 영혼이 온전해 질 때까지 작은 모습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요"
"흐음, 그렇구나. 그럼 여기 있는 동물들은 다 영혼인 거네. 왜 이 녀석들은 네 주위에 있는 거야?"
카이드락의 질문에 나무 가면은 고개를 숙였다.
"그건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과연 제가 가도 될까 고민이 들어서요. 저 때문에 많은 힘든 일을 겪었을 텐데 이런 내가 가도 되는 걸까라고 말했더니 이 애들이 도와준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생각하는 요정의 이미지에 맞게 이 나무 가면과 공연도 함께해 주었지요. 하지만 저는 차마 가면을 벗고 이름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전부 망쳤지만요. 그러니 전부 제 탓이예요"
이능력은 아니란 말에 흥미가 떨어져 아이의 이야기를 반쯤 흘려듣고 있던 카이드락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나무 가면에게 물었다.
"그리고 보니 위험한 녀석이 또 있었지? 광장에서 만난 녀석도 가면이라 해야 하나 얼굴에 쓰고 있던 탈이 없어지자 그 덩치처럼 이상해졌던데 왜 그런 거야?"
나무 가면은 카이드락의 말에 이상한 듯 쳐다보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씌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보니 가면이....? 형은 살아있는 사람인가 보네요. 놀라워요! 살아있는 사람이 이 안에 있다니....대체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오히려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오는 나무 가면에 카이드락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아, 그건 어떤 망할 노친네가.....뭐 이건 들어봤자 의미 없는 얘기고, 아까의 질문을 다시 물어보자면 대체 왜 너희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거야? 아까도 이상한 까마귀가 가면을 주면서 절대 벗지 말라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뭐 이미 버렸지만"
"가면을 버렸다고요?!"
"응"
당당한 카이드락의 태도에 나무 가면은 한숨을 쉬더니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해주었다.
"가면은 축제를 즐기기 위한 도구예요. 그...저희 중에는 죽을 때 좋은 이유로 즉, 호상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가면으로 생전 어떻게 죽었는지 원한을 최대한 억누르는 거예요. 거기다 가면을 쓰면 서로가 누군지 잘 알아보지 못하니까요. 모든 건 그저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이날은 싸우는 날도 슬퍼하는 날도 아닌 모두가 즐기기 위해 있는 날이니까..."
"그럼 너도 원한이 남아있어?"
"원한까지는 아니지만....저도 호상은 아니였어요"
어딘가 씁쓸한 목소리에 카이드락이 아까 만나고 싶다는 사람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물으려던 찰나 멀리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콰아앙!!!!
"무, 무슨 일이지? 방금 어디서 큰 폭발음이 들리지 않았어요?"
"아 맞다! 비비! 나 여기에 친구들과 같이 왔어. 싸움 도중에 나만 이탈되었는데 그 애들은 괜찮을까?"
당황한 나무 가면의 말에 카이드락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걸 지금에야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큰일이야. 오르노프가 그 애들을 쫓아 가버렸어"
화난 호박 가면이 오르노프와 낯선 애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흥! 알 게 뭐야? 에이커스와 관련된 녀석들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
팔짱을 끼며 자신과 상관없다는 순무 가면의 태도에 화난 호박은 그의 등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도발을 정말 믿는 거야? 목소리를 봐선 아직 애들이라구! 무엇보다 진짜 에이커스의 혈육은 저기 있잖아!"
화난 호박 가면의 손가락이 콜록 거리며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고양이 가면에게 향하자 순무 가면은 분노에 차 다시 고양이 가면의 멱살을 쥐었다.
"이 자식, 아직 있었구나! 감히 뻔뻔스럽게도 내 앞에서 그 이름을 말하다니"
"너 아직도 할 거야? 축제는 싸우라고 있는 곳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있는 곳이라고!"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도 에이커스한테 죽었잖아. 그러니 이런 녀석은..."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사실 나 에이커스한테 큰 원한은 없어"
당장이라도 고양이 가면에게 주먹을 날리려던 순무 가면은 화난 호박 가면의 말에 스르륵 힘이 풀렸다.
"뭐...? 너도 분명 예전에 에이커스를 혼내주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거야 당연하지. 에이커스한테 아프게 죽었으니까. 원한은 없지만 때려주고 싶은 건 마찬가지라구! 어디까지나 본인 한 테지만 말이야"
"너...."
"실은 너희랑 다르게 나는 그럴만해서 죽었달까? 하하....실은 나 생전에 엄청 글러먹은 녀석이었거든. 말단이라지만 범죄조직에 가입해서 폭력, 약물 등 양아치 짓은 다했지. 내 꿈은 무대에 서는 것이었지만 그럴 돈이...없었거든. 그래서 그 울분을 나쁜 짓으로 풀다가 어느 날 에이커스를 만나서 가버린 거지"
"그래서 그렇게나 열심히 공연을 준비했던 거구나. 미안...몰랐어"
"공연은 됐어. 아무래도 올해는 끝난 거 같고 내년을 준비하면 되지. 프라우, 너도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마. 에이커스는 살인마에 나쁜 녀석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용사로써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했거든. 그러니까..."
"콜록! 콜록!...뒤에.."
"응, 뭐라고?"
콜록거리는 소리 때문에 고양이 가면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은 화난 호박 가면이 다시 물으려고 할 때 등 뒤에서 아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어딨어?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 열기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화난 호박 가면의 눈에 피처럼 붉고 온몸이 타버릴 듯한 화마가 펼쳐져 있었다. 그 화마 속에서 걸어오는 자는.....
-또다시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가지 말아 줘....카멜리아
"한스!! 여기서 폭탄을 터트리면 어떡해?!"
뿌연 연기 속에서 잔해를 밟고 자랑스레 웃고 있는 한스를 향해 내가 소리쳤다.
"히히히, 아무리 죽지 않는 녀석이라도 이렇게 잔해에 깔려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모두 축제 때문에 밖으로 나가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누가 건물 안에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뭐 어때? 어차피 다들 죽은 녀석들인데"
"너...."
"비비, 너도 슬슬 눈치챘을 거 아냐? 우리 빼고 여기 있는 녀석들은 죄다 망자들이라는걸. 아무래도 길을 잘못 찾아온 거 같네. 아니면 그 파란 악마가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던가. 어느 쪽이든 폭발로 날려버려도 아무 문제 없지만 말이야"
사실 아까의 대화로 인해 눈치채던 참이었다. 제대로 이름과 키를 말하지 못했던 고양이 가면. 그리고 에이커스가 한 짓이라며 머리의 끔찍한 상처를 보여준 순무 가면. 현재 국가 용사로써 활동하고 있는 '에이커스 호스로프'는 정확히 말하면 에이커스 호스로프가 아니다. 왜냐하면 에이커스는 부활 마법으로 다시 몸을 움직이게 된 이탈자이기 때문이다.
부활 마법. 세간에는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마법으로 알려진 그 금기의 마법은 사실 그 이름과 효과가 다르다. 그건 바로 죽은 자의 몸에 재물인 산 자의 영혼을 넣어 죽은 자의 몸으로 산 자가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활 마법의 정확한 효능은 부활이 아닌 다른 이의 영혼을 그 몸에 넣는 마법에 가깝다. 그러니 아마 고양이 가면이 찾았던 이는 부활 마법 이전. 즉, 어릴 때 죽은 진짜 '에이커스 호스로프' 이고, 순무 가면이 말했던 이는 제물로 사용되었던 '에이커스 호스로프의 몸에 들어간 영혼'을 가리켰던 거겠지. 망자를 찾는 고양이 가면도 망자이고, 에이커스한테 살해당한 순무 가면도 망자이다. 고양이 가면이 에이커스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못했던 것은 에이커스로 인해 죽은 이들이 많았던 탓일 테고.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잖아. 부서진 건물 잔해에 누가 맞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보니까 가면이 벗겨지면 큰일이 벌어지는 거 같네"
"네 말대로 망자들이 죄다 나갔으니 다행이지. 거기다 이 녀석도 새로운 무덤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망자는 무덤에 있어야지 이렇게 나오면 쓰나?"
"....그나마 사람이 많은 데서 폭탄을 안 쓴 거에 칭찬이라도 해야 하나"
"그치? 잘했지? 비비, 칭찬해 줘!"
"시끄러워"
망치를 빙빙 돌리며 너무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한스에게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말하려던 찰나 잔해 손에서 커다란 손이 튀어나오더니 한스의 오른쪽 다리를 잡았다.
"한스!"
"진짜 질기네. 이딴 녀석쯤은....큭!"
망치를 휘두르려던 한스는 뼈가 부서진 듯한 강한 고통에 행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
"무슨 악력이?!"
한스가 고통으로 마비된 사이 어느새 거대한 덩치가 잔해를 떨치고 나와 한스 앞에 서있었다.
-...아아
"기다려! 내가 금방 구해줄 테니까"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내가 움직이려는 찰나 오르노프와 비슷한 크기의 새까만 거한이 나타나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젠장, 또 적인가?"
갑작스레 나타난 거한은 경계하는 나를 지나치고 폭주한 오르노프에게 달려가 한스를 떨어트렸다.
"이번에야말로....."
-지킬 거야!!
어딘가 음울하고 슬픈 목소리를 가진 거한은 오르노프가 움직일 수 없도록 팔과 허리를 꽉 붙잡았다.
"한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윽! 다리가 조금 아프지만 괜찮아. 그보다 저.....사람은?"
한스는 뼈가 부서진 듯한 다리의 고통보다도 앞에서 오르노프를 막고 있는 거한에게 눈이 쏠렸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탄 몸. 폭주한 것처럼 거대한 덩치. 무엇보다도 어디선가 그리움을 부르는 저 목소리. 평상시에는 잘만 돌아가던 한스의 머리는 마치 누가 망치로 머리를 때린 것처럼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잡고 있어!"
한스가 홀린 듯 거한을 향해 손을 뻗자, 저 멀리서 익숙한 음성과 함께 무언가가 날라와 버둥거리던 오르노프의 목 위에 씌어졌다.
"나이스! 역시 나야. 멀리서도 잘 맞춘다니까!"
그림처럼 화려하게 지붕에서 뛰어내려와 착지한 까마귀 가면은 눈코입이 뚫린 양동이가 제대로 씌었는지 확인하고 거한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반면에...이 멍청아! 제대로 경비도 서지 않고 뭐 하는 거야?! 거기다 가면은 또 어디다 팔아먹었어? 가지고 있던 건 저거 하나밖에 없단 말이야"
"미안....너무 답답해서"
"답답해서 가면을 벗었다고? 네가 제정신이야?!"
거한을 마구 구박하는 까마귀 가면의 모습에 계속 내 옆에서 부축받고 있던 한스는 자신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어 거한에게 내밀었다.
".....이거"
"한스,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난 괜찮으니까 이것 좀 전해줘"
어쩐지 평상시의 활기찬 모습과는 다르게 축 처져있는 한스의 모습에 나는 걱정이 들었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걸까? 이 녀석은 배에 구멍이 뚫려도 할 말은 하는 녀석인데. 혹시 아까 방심했던 게 충격이 컸던 걸까?
"ㅎ.....그 괜찮니? 내게 이걸 주면 네가 생자라는 걸 들키게 될 거야"
"나는 필요 없으니까....어서"
떨리는 손으로 녹색 괴물 가면을 받아든 거한은 새까만 얼굴로 유일하게 타지 않은 치아를 보이며 한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항상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네가 언제나 자랑스럽구나"
"?!"
한스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뻐끔뻐끔 벌리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진 나는 어느새 옆까지 다가와 내 머리를 향해 꿀밤을 날리는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내가 분명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잖아?!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냐?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이렇게 어른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로 자라지 않았을 텐데"
어쩐지 굉장히 억울한 기분이 드는 나는 까마귀 가면을 향해 소리치고 말았다.
"설명도 없이 그렇게 가버리면 누가 말을 들어요?! 거기다 제가 어떻게 자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부모님 없이 자랐는지 아닌지 자기가 어떻게 알아? 따지려면 나를 홀라당 내버려 두고 떠난 아버지를 탓하던가. 어쩐지 까마귀 가면의 말을 듣자 속에서 올라오는 울분과 억울함에 조금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딱 봐도 바가지 씌우려는 사람을 뭘 믿고 말을 듣는데요? 거기다 당신이 뭔데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어어어?.....;;"
"하하하, 당했군. 이건 네 잘못이야"
가면을 쓰고 몸이 작아진 녹색 괴물 가면은 까마귀 가면에게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자연스레 까마귀 가면을 놀리는 모습을 보니 저 사람은 음울한 모습보다는 장난스러운 모습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비웃지 마. 따지고 보면 너도 잘못한 거 없거든. 대체 뭐 하느라 자리를 비운 거야?"
화살을 자신한테서 녹색 괴물 가면으로 옮겨버린 까마귀 가면은 노려보는 내 눈을 슬쩍 피하며 물었다. 까마귀 가면의 말에 미심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은 거한은 순순히 자신을 잘못을 인정했다.
"미안해. 그게 입구에서 경비를 서는데 불이 보여서 말이야. 그 너도 알다시피 내가 불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리잖아. 그래서 잠시 창고로 가서 정신을 추스르고 있었지.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그곳에서 쉬고 있던 거였는데 거기에 누가 오더라고. 그래서 가면을 창고에 두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떠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대체 누가 들어갔다는 거야? 창고는 외곽 쪽에 있어서 관계자가 아니면 찾으려고 해도 어려울 텐데"
가라앉았던 기분을 추스르고, 슬슬 다친 한스와 사라진 카이드락이 걱정될 때쯤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뛰어오고 있었다.
"비비!"
"카이드락!"
카이드락은 그대로 내게 포옹하더니 정말 힘들었다며 우는 시늉을 했다.
"정말 보고 싶었어! 마법도 안 써지고, 이상한 녀석한테 쫓기기도 하고 진짜 힘들었어. 엉엉"
"그래. 너도 고생이 많았구나. 다친데는 없어 보여서 다행이야"
"마법이 안 써진다니까! 그건 엄청 다친 거라고!.....근데 한스는 왜 저래?"
"헉! 헉! 혼자 가시면 어떡해요?"
미약한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니 나무 가면을 쓴 아이가 카이드락이 뛰어온 방향에서 비틀비틀 걸어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 맞다. 얘도 있었지. 이 애는 아까 쫓길 때 나를 도와줬어. 익숙한 가면이지? 광장에서 동물쇼를 하던 그 아이거든. 정말 위급한 상황에 나타나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그래 딱 저렇게 생긴 녀석한테..........에엑?! 저 녀석은 나를 쫓던 그 덩치잖아?!"
"괜찮아. 저분은 우리를 도와주신 분이셔. 지금은 가면을 쓰셨으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한스는 조금 다쳐서 그래"
"한스가 다쳤다고 저렇게 힘이 없다고? 그럴 애가 아닌데 혹시 머리라도 다친 거야?"
"손 치워. 지금 너 따위에 신경 쓸 때아니니까"
"음. 멀쩡한 거 같네!"
앞에서 손을 휙휙 휘저은 카이드락은 한스한테서 살벌한 대답이 나오자 안심한 듯 웃었다. 내 친구라지만 저런 말을 듣고 웃는 카이드락이나 대마왕한테 막말하는 한스나 둘 다 보통이 아닌 거 같아. 내가 실없는 생각이나 하며 친구들을 보고 있자 까마귀 가면은 한숨 쉬며 녹색 괴물 가면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애들은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까 몰라"
"저 애가 마족과 함께 있다니..."
카이드락과 장난치는 한스의 모습에 녹색 괴물 가면은 착잡한 목소리를 내었다.
"뭐 우리는 지나간 세대니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한테 뭐라 할 수는 없지. 기분은 이해되지만 참아"
"셴. 너는 그걸로 괜찮은 거야? 너는 부인이...."
걱정스러운 녹색 괴물 가면의 말에 까마귀 가면은 외면하듯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근데 겨우 야채 머리 3인방의 불장난이 무서워서 창고로 들어갔다고?"
쓰러진 양동이 가면을 가리키며 까마귀 가면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녹색 괴물 가면은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까마귀 가면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냐아냐, 진짜 굉장했다고. 겨우 불장난이 아니었단 말이야. 보고만 있어도 그때가 떠오르는...."
"누가 좀 도와줘!! 제발!"
여기 있는 모두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을 때 그 모든 착각을 깨부수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자 화난 호박 가면이 정신을 잃은 순무 가면을 업고 비틀거리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큰일이야. 뭔가 굉장히 무서운 게 나타났어. 모두 도망쳐야....."
-여기 있어?
저건 화마다. 수천수백의 울음소리와 끔찍한 살육으로 만들어진 듯 새빨간 불꽃이 주위에 번져나가며 그 안에서 장신의 '무언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건 마족?
"프라우!!"
불로 이루어진 듯한 마족의 손에는 검이, 다른 손에는 푸른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저 남자가 고양이 가면인가?
남자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친 나무 가면은 옆에서 동물들이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불속에 뛰어들 것 같았다.
"세상에 어째서 프라우가 저기에 있는 거죠? 구해야 해요!"
"넌 설마..?"
나무 가면 뒤의 앳된 목소리를 듣고 나는 그제야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에이커스는 이 몸이 아주 어렸을 때 들어왔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이 아이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 였어야 할....
"부탁이야. 나 줘, 얘들아! 이대로 가다간 프라우가 사라질지도 몰라. 정말 오랜 시간을 걸쳐 간신히 만났는데 이런 식으로 헤어질 수 없어"
-....오랜 시간? 내가 카멜리아를 기다린 시간만 할까?
나무 가면의 말을 비웃듯 화마를 뿌리며 걸어오던 마족은 비틀린 웃음소리를 내었다.
"잠깐? 카멜리아라면 분명히.."
몇백 년 전 대마왕 나드문을 물리치고 세상을 떠난 용사 카멜리아. 그녀는 그와 동시에 '나이아'의 조각이기도 한 사왈인 중 한 명이며,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마왕 나드문의 스승이기도 했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와는 달리 나드문과 카멜리아는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고 들었다. 그래서 노년의 카멜리아가 수명의 끝을 바라보자 절망한 나드문은 대마왕이 되어 이 세상을 잔혹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고 결국에는 카멜리아의 손에 끝을 맞이했었지. 에라누시와 아슈마후 한테서 들은 나드문이 대마왕이 된 이유와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떠올린 나는 눈 앞에 서있는 마족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자, 카멜리아! 만나러 왔어. 그러니 그 찬란한 모습을 내게 보여줘.
환호와 광기에 찬 목소리로 나드문이 팔을 벌리자 주변의 새빨간 불꽃들이 호응하듯 더욱 매섭게 번져나갔다.
"으아아...불이. 불이"
"젠장! 이쪽도 제정신이 아니잖아. 진정해. 애 앞에서 창피한 모습 보여줄 거야?"
참혹한 전쟁의 불길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화마에 녹색 괴물 가면은 머리를 쥐며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차마 두고 갈 수 없던 까마귀 가면은 녹색 괴물 가면을 달래며 나드문을 노려보았다.
"이래서 마족들이 문제라니까! 마족들은 하나같이 영혼의 상처가 깊어서 골골거릴 텐데 저 녀석은 왜 이렇게 날뛰는 거야?"
"저 자는 대마왕 나드문이에요"
내 말에 뒤에서 벌벌 떨던 화난 호박 가면이 반응했다.
"나드문이라고? 그 유명한? 아무리 대마왕이라도 죽으면 보통 망자들과 다를 바 없을 텐데 저 녀석은 어떻게 힘을 쓸 수 있는 거야?"
확실히 저만한 열기를 내뿜으며 불에 감싸인 나드문은 마법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울 거 같았다. 하지만 피처럼 붉고 보고만 있어도 정신이 나갈 거 같은 불길은 나드문을 따른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드문을 옥죄는 사슬처럼 보였다.
"저건 '업'이야"
"네?"
까마귀 가면은 계속 떨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녹색 괴물 가면을 가리켰다.
"너도 이 녀석과 아까 쓰러진 녀석이 가면을 벗을 때 봤지? 몸이 커지고 엄청난 괴력을 냈잖아. 그건 모두 업 때문에 그래. 살해당한 녀석들은 원한이 엄청 강하거든. 특히 최근에 온 녀석이나 아니면 큰 충격을 받은 녀석들은 가면이 없으면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쉽게 폭주하게 되지. 그런데 저 녀석은 조금 달라"
사슬처럼 새빨간 불꽃을 부른 나드문은 괴롭지도 않은지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건 저 녀석 자신의 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업이야. 그것도 하나가 아닌 수천. 어쩌면 그 이상 일이도 모르지"
"원망을 저렇게나 받다니 굉장한 녀석이네"
어쩌면 나드문 이상으로 업을 쌓았을지도 모르는 카이드락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나드문을 보고 말했다.
"너도 대마왕....됐다. 그럼 나드문을 진정시킬 방법은 없나요? 적어도 저기 있는 사람은 구해야 할거아니예요"
무리하게 다가가려다 불길에 상처 입은 나무 가면이 내 말을 듣고 내 옷자락을 움켜쥐며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프라우를 구해주세요. 전부 제 잘못이예요. 제가 진작 가면을 벗고 이름을 알리기만 했어도 프라우가 저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벌이라면 제가 받을 테니까 꼭 프라우를 구해주세요!"
주위를 둘러보니 한스는 다친 다리를 움켜지며 나드문을 노려보고 있었고, 카이드락은 이 모든 게 재밌는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아무리 카이드락이라도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진작 썼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몸은 보호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다는 건 아마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거겠지. 광장에서 무력하게 날려진 카이드락을 떠올리며 이곳에서 나설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저분을 구해올게요"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런 불길을 뚫고 가면을 씌울 수 있을리가 없잖아. 거기다 그 가면도 아까의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녹색 괴물 가면을 부축하며 무언가를 매만지고 있던 까마귀 가면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나를 말렸다.
"기다려. 내가 해결할...테니까"
한스가 아픈 다리를 끌고 나서려 하자 나는 그를 다시 주저 앉히고 앞으로 나섰다.
"비비, 이거 너 가져"
카이드락이 그런 내게 긴 칼을 건네며 말했다.
"그거 정글도라고 하는데 너를 위해 목숨을 걸고 구해온 거야. 잘했지?"
"그래. 고마워"
정말 카이드락이 나를 위해 이 칼을 가져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맨손으로 저 불길을 뚫고 타격을 먹이기는 어려웠기에 나는 감사히 칼을 받았다. 거기다 상대도 칼을 가지고 있으니 맨몸으로는 한층 더 불리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구하는 게 용사니까"
나는 곧바로 몸을 날려 일단 남자를 들고 있는 팔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너는 카멜리아가 아니잖아!!
나드문은 크게 포효하며 내가 내지르는 검격을 막았다. 동시에 검에 붙어 있던 뜨거운 불길이 내 몸에 닿았다. 그러자 수많은 원망과 저주가 내 머릿속에 파고들어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평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이가 울부짖었다.
고통으로 증오로 슬픔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어갔다.
향긋한 내음을 풍기던 농작물들이 있던 대지는 피와 살이 엉켜 붙은 곳으로 변했고, 그 위에서 하늘의 선도자가 공평하게 죽음을 내리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가 죽어야 하는 건데?
배고파. 아파. 괴로워.
가족도 죽고 연인도 죽고 나도 죽었어. 그런데 왜 너는 살아있어?
"크윽!"
머리를 가득 채우는 소리에 그 자리에서 크게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파! 괴로워! 뜨거워! 당장이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래선 안돼.
-분명 여기 어딘가에서 카멜리아가 느껴졌는데 왜 보이지 않는 거야?!
찾고 있던 이를 발견하지 못해 분노한 나드문은 쥐고 있던 남자를 던져버리곤 대신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적어도 남자는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말해. 카멜리아는 대체 어디 있어? 분명히 이 근처에서 그녀의 '영혼'을 느꼈어
전쟁의 화마를 지나쳐 직접적으로 본 나드문은.....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제발 이 세상에 나만 남겨두고 가지 말아 줘.
-오랫동안 찾고 찾다가 이제야 너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대체 왜 내 앞에 나타나주지 않는 거야?
허무 속에서 단 하나의 빛을 찾는 듯 나드문의 외침은 공허하고 필사적이었다.
"...이렇게나 원망 받고 있는데 당신에겐 아무 감정도 전해지지 않는군요"
분명 닿기만 해도 미쳐버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그 참혹한 전장이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 정도로 강한 이 화기도 나드문은 전부 무시하고 오직 카멜리아만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대마왕 나드문. 그런 당신을 용사로써 절대 내버려 둘 수 없어"
-?!
어딘가 그리운 이가 생각나는 말에 나드문이 멈칫하자 그 틈을 타 발로 나드문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비비! 괜찮아? 역시 나도 참전할까? 아직 마법은 안 나오지만..."
어느새, 응원봉처럼 건물의 잔해를 들고 응원하던 카이드락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었다.
"넌 그냥 거기서 응원이나 해"
"역시 그게 좋겠지? 힘내라! 힘내라! 우리 비비 파이팅~!"
쟤는 대체 아슈마후에게 무얼 팔아넘겼길래 저렇게 되었을까? 사실 팔아넘긴 게 양심이나 부끄러움이 아닐까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하며 나는 얼굴에 있는 푸른 말 가면을 벗고 뒤쪽으로 던졌다.
"이 가면을 그분께 씌워주세요!"
이걸로 프라우가 조금이나마 편해졌길 바라며 나는 다시 검을 앞에 겨누었다. 그 모습에 흠칫 한 나드문은 곧바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카멜리아? 너한테서 카멜리아의 영혼이 느껴져
나드문은 수명을 앞둔 카멜리아를 살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아마 십중팔구 영혼과 관련된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였겠지. 그 과정에서 영혼을 민감하게 느끼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아슈마후가 영혼을 먹으니, 그와 가장 이어져있던 나드문도 그 영향을 받았겠지.
-너 뭐야? 네가 뭔데 카멜리아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거야? 내놔.....그건 내 거야!!
지금까지와는 달리 확실한 살기를 풍기며 이번에는 나드문쪽에서 내게 검을 휘둘렀다.
챙!
방금 손목 나갈뻔했어. 단 한 번 검을 맞붙이친것으로 손안의 정글도를 놓칠 뻔한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드문이 재차 검을 휘두르려 하자 어딘가에서 탄환이 날라와 나드문과 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아 이건 [총]이라는 거다. 근 백년 사이에 만들어진 스탄의 최식식 무기지.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너로썬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물건이다. 이 말이야"
아까전부터 한참 무언가를 조립하던 까마귀 가면은 총을 나드문에게 겨누며 말을 이었다.
"어른이 돼가지고 한심하게 보살핌만 받을 순 없잖아. 마왕전이 처음도 아니고 이쯤은 문제없어"
"그거 이번에 처음 쓰는 거 아냐? 어떤 멍청이가 신기한거 놓고 같다고 좋아했었잖아"
"시끄러워. 너는 계속 골골대고 나 있어"
조금은 나아진 듯한 녹색 괴물 가면에게 까마귀 가면은 한번 윽박지르곤 내게 고개짓했다.
"꼬맹이. 내가 엄호해 줄 테니 너는 그놈을 잡아. 걱정 마라, 처음이든 뭐든 완벽하게 쏴줄 테니까 말이야.....적어도 너는 안 맞추도록 노력할게"
살짝 힘이 빠지는 말을 듣자 잠시 등 뒤가 서늘해졌지만 이내 칼을 고쳐 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근데 저 검은 대체 뭐야? 뭔데 불속에서도 멀쩡히 휘두를 수 있는 건데?"
"아, 사실 저거 내 거야. 그게 공연에서 쓰기 위해 특별히 제조한 검인데 무력하게 뺏겨버렸어. 미안해"
"그걸 뺏기면 어쩌자는 거야?!"
등 뒤에서 무언가 말이 오갔지만 나는 신경을 끄고 나드문을 향해 다시 칼을 휘둘렀다. 나드문은 자신의 어깨를 향해 쇄도하는 칼을 가볍게 피하며 이번에는 검을 눕히고는 내 배를 향해 찔렀다.
탕!
"감히 누구 몸에 구멍을 내려 하는 거야? 내가 있는 이상 어림없다!"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엄호하는 까마귀 가면에 의해 공방은 계속 이어졌다.
-.....한심해. 실력이 완전 엉망진창이야. 카멜리아는 이러지 않았어.
갑작스러운 팩폭에 마음이 다친 나는 울컥해서 쏘아붙였다.
"저는 무투가라 그렇거든요!"
뿔을 향해 내질러 오는 칼을 고개를 젖혀 회피한 나드문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째서.....네게서 카멜리아가 보이는 걸까?
크게 휘두른 반동으로 칼을 회수하지 못한 나는 한순간에 치고 들어오는 나드문을 피할 수 없었다.
철컥! 철컥!
"이런, 총알이 다 떨어졌어!"
더 이상 나를 지켜주던 총알이 떨어지자 나는 한순간에 나드문에게 제압당해 그와 눈을 마주쳤다. 큰일이다. 이대로는 당하고 말 거야. 검을 겨누기만 할 뿐 내지르지는 않던 나드문은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확하게는 내 눈을. 눈과 눈이 맞대자 나드문의 감정이 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하하! 알겠다...너, 나무 요정이지?'
숲을 거닐던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힘이 약해서 검을 제대로 들 수 있겠어? 자! 다시 해봐'
그녀가 자아내는 검술이 아름다워 처음 검을 배우고자 했을 때.
'미안, 오늘은 피곤해서 그만 들어가 볼게'
세월이 지나 힘이 달리는 듯 예전이라면 가뿐히 해낼 일도 하지 못했을 때.
'.....나드문. 오늘 여기서 너를 막을 거야'
계속 함께 있고 싶다는 나의 간청보다 지키고자 하는 다른 것들을 택했을 때.
나드문의 감정이 소용돌이가 되어 내 머릿속을 휩쓸었지만 나는 가까스로 움켜지고 있던 칼을 나드문을 향해 내찔렀다. 목에 겨눠지고 있던 나드문의 검은 내 목을 베는 대신 스르륵 내려갔다. 반쯤 찔릴 각오를 하고 움직였던 터라 나는 공격을 포기한 나드문의 태도에 당황스러웠다. 그런 나의 감정을 느낀 것일까? 나드문은 처음의 광기에 찬 웃음과는 달리 어쩐지 후련하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거기 있었구나. 내가 너를 원망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미 그런 건 아주 오래전에 버렸으니까.
칼이 나드문의 몸을 관통하는 걸 느끼며 나는 사라져 가는 나드문을 멀거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그건 뭐였을까?
"비비! 이겼구나. 축하해. 너는 이로써 대마왕을 두 번이나 물리친 용사 중의 용사야!"
"아프니까 좀 제대로 해봐. 젠장, 다리만 아니었어도 망치로 그 녀석을 날려버렸을 텐데"
카이드락에게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한스가 투덜거렸다. 다 끝났구나. 솔직히 총알이 다 떨어졌다고 했을 때는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모든 게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다. 뭐, 마지막에는 나드문이 봐준 거 같긴 하지만 이긴 건 이긴 거니 내 승리였다.
"이제 지쳤어"
"비비! 땅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
"축제에 놀러 와서 대체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 파란 악마 만나면 용서 안 할 거야"
투덜거리면서도 함께 어울리는 세 아이들을 보며 녹색 괴물 가면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녀석도 있지만 저 셋이라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헤쳐나가리라. 그런 생각에 방금까지 화마로 괴롭던 심상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까마귀 가면도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누운 소년을 쳐다보았다.
"셴, 괜찮은 거야? 아마 블랙도..."
"아들은 아들이야. 난 절대 그 멍청한 마족처럼 헷갈리지 않아"
"....하지만 영혼은 저 아이 몸속에 있는 거잖아"
"겨우 영혼 따위로 내 사랑을 가로막을 순 없어. 그 마족은 몇백 년 만에 나오다 보니 마지막에 눈이 맛이 간거 같은데 나는 달라. 설령 블랙의 영혼이 나이아의 일부라고 해도 그런 걸로 내 사랑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 말이야.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블랙의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그러니 나는 언젠가 블랙과 재회할 때까지 내년이고 내후년이고 어쩌면 수백년 그 이상까지 기다릴 수 있어. 내 자신이 완전히 마모되어 사라질 때까지"
"너...."
"그도 그럴게 블랙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내 아내니까"
"하여간 정말 사랑꾼이라니까. 누군 아내 없는 줄 알겠어"
그 목소리에 한 점 의뭉도 없다는 걸 깨닫자 녹색 괴물 가면은 다시 미소 지으며 자신의 자랑스러운 아이를 쳐다보았다. 저 아이가 언제나 행복을 전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만큼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프라우...정신이 들어요?"
모든 것이 다 끝나갈 때쯤. 이곳에 또 다른 재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는 순간이.
"아....너는 설마 에이커스야?"
이젠 푸른 말가면이 된 남자가 자신의 소중한 아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나무 가면은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가면을 벗고 감쳐왔던 눈물을 터트리며 자신의 부모를 보았다.
"네, 맞아요. 저예요"
"역시 헤어졌을 때와 달라졌구나. 네가 이렇게 자란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 이상까지도. 푸른 말 가면은 뒷말을 더 잇지 못한 채 아이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내가 용기가 없어서 너를 찾지 못했어. 좀 더 빠르게 용기를 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너무 미숙해서 동물의 모습일 때도 그저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요. 혹시나 제가 너무 빨리 죽어버려서 프라우와 커티스를 괴롭게 했을까 봐 무서웠거든요. 거기다 제가 죽은 후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들었어요"
자신과 비슷한 고백을 해오는 아이를 보며 푸른 말 가면은 아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내가 너를 미워할 리가 없잖아. 이렇게 나와 커티스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인 걸"
"흐윽....으아앙!!"
아이는 부모의 품에 안겨 그동안의 슬픔과 괴로움을 토해내었다. 사실 무서워서 너무 미안해서 다가가지 못했는데 상대 또한 자신과 같다는 걸 알자 비로소 자신이 저들의 아이가 맞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저 그 '에이커스'를 진짜로 취급하고 저는 외면할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프라우가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알자 엄청 기뻤어요. 프라우와 커티스한테 있어서 진짜 아이는 나구나. 나밖에 없구나 하고요. 저 못됐죠?"
"그렇지 않아. 그 녀석을 내 아이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하지만 그 녀석을 망친 것도, 앞으로 그 녀석이 지고 나갈 죄도 모두 나의 죄이니도 하니까 그게 괴로웠던 거야"
"그러면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제가!"
"나와 커티스가 만들어 낸 작은 축복. 너를 잃은 건 그 누구의 죄도 아니야. 단지 너무나 슬픈 일이였을 뿐이지"
부모와 아이는 다시는 서로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포옹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품었던 오해를 말하며 대화를 계속해 나갔다. 앞으로 이 마음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사랑을 전하며.
"에이커스가....어린애? 거기다 존댓말까지......으어어어어"
"다시 쓰러지면 어쩌자는 거야? 오르노프까지 쓰러진 마당에 나보고 너희 둘을 어떻게 옮기라고?!"
비비의 상태를 확인하고 푸른 말 가면과 아이의 재회를 바라보고 있던 카이드락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드문이 여기에 있었다는 건 아마 그 사람도...."
카이드락은 조심스레 말을 거는 비비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샌가 나타나 혀를 내밀고 있는 검은 뱀이 있었다. 그 눈의 색깔은....
"붉은색이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이젠 괜찮으니까"
"그래 맞아. 이제 너희들은 슬슬 돌아가야지. 축제도 재개해야 하고 할 일이 정말 많다고"
까마귀 가면이 카이드락의 말에 동의하는 듯 녹색 괴물 가면을 재촉했다.
"이제 네가 일 할 시간이야. 그만큼 쉬었으면 충분하겠지?"
"잠시만요! 아직 당신한테 할 말이 남았어요. 정말로 당신이 제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면...."
릴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존댓말을 쓰는 한스의 모습에 당황하는 사이 녹색 괴물 가면이 다정하게 한스의 머리를 쓰담아 주었다.
"소동은 여기까지. 너희들은 따로 즐겨야 할 축제가 남아있잖니?"
"잠ㄲ..."
한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안개가 우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우리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정신이 드시오? 벌써 축제가 시작되었는데 오지 않아 걱정되어 이렇게 찾으러 나왔소"
눈을 뜨자 거기엔 아주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 드는 삼하인이 서있었다.
"삼하인?"
"이런 곳에서 잠을 자면 자칫 위험해질 수 있소"
멍한 정신을 깨우며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들은 숲속 한가운데에 누워있었다.
"흐음~ 잘 잤다"
".....여긴?"
카이드락과 한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 일어나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전부 꿈이었던 걸까?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일 때 내 손에 정글도가 들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코스튬이오? 깜짝 놀래주기 위해 일부로 축제에 관해 말 안 했건만, 과연 위대한 분은 다르오"
"파란 악마! 이 자식, 우리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적어도 뭐 하는 축제인지는 말해야 할거 아냐?"
한스는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다는 듯 멀쩡히 걸어가 삼하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거 미안하군. 축제에 대해 말 못했던건 이것 때문이오"
삼하인의 손이 가리킨 방향을 보자 거기엔 [Samhain festival]라고 적힌 매우 화려한 간판이 보였다. 그제야 이곳이 완전한 숲이 아닌 축제장 근처의 나무라는 것을 깨닫자 그제야 맛있는 냄새가 내 코를 간질였다.
"비비, 맛있는 냄새가 나!"
"후후후. 축제에 음식점이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소?"
"파란 악마. 그래서 저게 대체 뭔데? 왜 네 이름이 저기 들어가 있는 거야? 설마 네가 축제를 연 거야?"
"그럴 리가. 저건 원래부터 저 이름이었소. 그저 이 지방에선 'Samhain'를 서우인이라고 발음한다오. 그러니 이 축제의 이름은 서우인 축제. 수많은 사람이 모여 악령이나 괴물로 분장해 즐기는 축제 이오"
축제는 입구까지 그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활기찼다. 망자들의 축제에 들어섰을 때와 비교하자면 극과 극이었다.
"깜짝 놀랐소? 그대와 만나기 위한 장소로 내 이름과 비슷한 이곳으로 골랐소. 부디 이 축제가 그대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화려한 입구를 지나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더욱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지? 꼬르륵 고파오는 배를 부여잡고, 나는 친구들과 망자들의 축제가 아닌 산 자의 축제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기:
길고 길었던 할로윈 합작이 이렇게 끝났군요. 첫 합작이라 많이 떨리고 미숙했지만 넓은 마음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서 가면은 망자들에게 꼭 필요한 안식입니다. 솔직히 생자인 주인공들에겐 필요없는거요. 그럼에도 벗지 말라했던 것은 과거의 인연에 엮여서 험한 꼴 당할까봐 말렸던거였습니다. 주인공들이 가면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성격에 따라 다르게 봤어요. 누군가는 버렸고, 누구는 가족을 위해, 누구는 처음보는 사람을 위해 줬죠. 거기에 망자들 중 유일하게 가면이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비비는 가면이 없는 두 인물 중 구해야 하는 이한테 주었죠. 이 의미는 카멜리아의 선택과 비슷하게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후기는 여기까지 하고,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재밌는 만화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려요!!
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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