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하지 못한 게 아닌, 구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 고 싶었으니까요."
은검돌 (@eum_gumdol)
옛날 옛적.
어느 한 마을에는 나이가 많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많은 재산과 아들이 셋이나 있는 아주 복이 많은 부부였습니다. 모두가 그 부부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부부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어요. 부부는 딸이 갖고 싶었거든요. 부부는 산 위로 올라가 양손을 모은 후 신목에 소원을 빌었습니다.
“신령님, 신령님. 어여쁜 딸이 들어서게 해주세요.”
신께서 정말 이 소원을 들어주신 걸까요? 이후 부부는 아주 하얗고 아름다운 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잣집에 오빠만 셋인 누이는 아주 외모가 뛰어나기까지 해서 마을에서 안 좋아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아주 아주 사랑받는 아이였죠. 누이는 그렇게 모두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어느덧 7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맘때부터 집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오늘도 그 집 소가 죽었대!”
“아니 또? 어제도 난리였건만...”
“마가 끼었나보지… 무슨 일이람...”
누이가 7살이 되던 해부터 집에 있던 소들이 하루에 하나씩 죽었던 것입니다. 두 눈알만 사라진 채 과다출혈로 죽어있던 소들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고 눈알이 사라진 것을 제외한 그 어떤 흔적도 없었기에 모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비싼 소를 잃고 싶지 않았던 아비는 첫째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네가 오늘 밤 외양간으로 가서 망을 보거라.”
“예, 아버지. 제가 꼭 범인을 찾고 말겠습니다.”
그날 밤.
첫째 아들은 외양간 근처에 숨어 소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네 시간이 지나도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피로는 점점 쌓여만 갔죠. 피로를 이기지 못한 첫째는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답니다.
다음 날. 또 소는 두 눈알만 사라진 채 죽어있었고 아버지는 첫째를 불러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기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피곤함에 못 이겨 졸아버린 것을 쪽팔려 알리기 싫었고, 알려지는 순간 아버지께 혼나고 싶지 않았던 첫째는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치고는 소가 죽어버린 것 때문에 아비는 첫째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비는 둘째를 부르며 말했습니다.
“이번엔 네가 한 번 망을 보고 오너라.”
“예, 아버지.”
그날 밤.
둘째 아들은 외양간 근처에 숨어 소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범인이 도중에 도망쳤다고 생각한 둘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습니다.
“하! 잡힐까 무서워서 이젠 못 오나보지?”
그렇게 말하며 둘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방에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또 다른 소가 똑같은 상태로 죽어있었습니다. 당황한 둘째는 자신의 오만함에 부끄러워 그만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첫째와 똑같이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비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대놓고 죽어있는 소를 죽인 범인은 망을 제대로 보지 않는 한 잡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비는 마지막 셋째 아들 블랙 보이. 줄여서 비비를 부르며 말했습니다.
“얘야, 이번엔 네가 한 번 망을 보고 오너라. 범인을 꼭 잡아야 한단다.”
“예, 아버지. 제가 잘 지켜보겠습니다.”
그날 밤이 되기 전. 비비는 약사를 찾아가며 말했습니다.
“거, 잠이 잘 오지 않는 약이 있는가?”
“찾아보겠습니다. 보통은 그 반대를 찾는지라 있는지 모르겠군요.”
다행히 약은 있었고 비비는 그 약을 마시고 외양간 근처에 숨어 소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네 시간하고도 반이 지날 때쯤 적막을 깨고 스르르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방에서 나온 누군가가 외양간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신 차리고 누군지 더 자세히 바라보자 비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누이가 방에서 나와 외양간으로 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이의 검은 머리는 점점 아름다운 하얀색으로 변하였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깃털들이 휘날렸습니다. 귀엽고 애교 많던 눈은 섬뜩하고 기괴한 여러 개의 검은 눈으로 바뀌었죠. 비비는 손으로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열심히 비명을 참았습니다. 여기서 들키면 자신에게 찾아올 것은 죽음뿐이었죠. 소는 아름다우면서 섬뜩한 누이의 미소에 홀려 도망가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습니다. 누이는 그런 소의 눈을 손으로 뽑아 먹어 버렸죠. 그러고 나선 싱긋 웃으며 방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누이가 완전히 방으로 돌아간 후 비비는 그동안 참아왔던 숨을 몰아 내뱉었습니다.
“허억… 허억… 세상에 이럴리가…”
열심히 부정했지만 소는 계속 죽어있는 상태였고 발자국 하나 남지 않는 모습은 누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려줄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비는 비비를 불러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라 하였습니다. 비비가 사건의 진상을 말하자 아버지는 크게 화내며 말했습니다.
“감히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누이를 판단 말이더냐!!”
“아닙니다, 아버지! 정말로 누이가 소를 죽였단 말입니다!!”
비비는 열심히 설명했지만 아비는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비가 망을 대충 보았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누이를 팔았다고 오해하고 있었죠. 배신감에 화가 잔뜩 치민 아비는 그대로 비비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비비는 마을에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역시 누이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죠. 결국 비비는 아주 먼 마을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을을 떠나기 전. 누이가 비비에게 찾아왔습니다.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를 용서했답니다.”
“허! 네가 한 짓을 난 똑똑히 봤다. 모두들 너에게 속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다!”
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오라버니를 향해 미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죠. 그 표정이 아쉬움인지 아니면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는 표정인지는 블랙 보이는 알 수 없었습니다.
블랙 보이는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사근사근하여 적응이 쉬웠고 조금은 귀찮지만 자신을 자주 도와주는 친구도 생겼으니까요.
“비비! 오늘도 재미없게 공부하는 거야?”
“공부는 항상 해야 하는 거야. 너는… 아니다. 너는 할 필요 없겠지.”
“당연하지! 나는 천재라고! 내년이면 바로 장원급제 할 당상이라고!“
머리를 위로 두 갈래로 묶어 마치 검은 토끼를 연상시키는 친구 한스는 항상 비비를 따라다니는 아이였습니다. 인성이 안 좋아 친구라고는 비비밖에 없는 아이지만 머리가 특출나게 비상해 소위 천재라고 불리며 마을의 유망주라고 불리는 인재였죠. 그들은 자주 티격태격하면서도 계속 같이 붙어 다니는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비비는 그 마을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곧 설이 되는 날. 한스는 비비에게 약간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비비… 이번에도 혼자 보낼 거야? 우리 가족이 같이 있어준다니까?”
“아냐… 괜찮아. 나 혼자서도 충분해.”
그날 저녁.
비비는 하늘 위 달을 바라보며 그때를, 누이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곤 문뜩 가족들이 걱정되며 그리워지기 시작했죠. 그때. 누군가 비비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갓을 푹 눌러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붉은 기운을 내뿜는 사내는 비비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습니다.
“고민이 있나 보군요.”
보통 같았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거나 무시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술술 그때의 이야기가 입에서 나왔습니다. 사내는 비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경험을 하시다니 많이 억울하셨겠군요.”
“예…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가족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병들을 가지고 가보는 건 어떠신가요? 당신을 도와드릴 겁니다.”
사내는 붉은 병, 푸른 병 그리고 하얀 병을 병을 주며 말했습니다. 자신은 요괴들을 퇴치하는 도사이고, 소를 죽인 누이는 요괴가 둔갑한 아이고 호리병들이 요괴를 퇴치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이죠. 비비는 믿지 못했지만 아예 아무것도 안 들고 가는 것보다는 좋기에 떨떠름하게 받았습니다. 블랙 보이가 본가로 돌아간 날은 그로부터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마을은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할 정도로 예전의 생기를 잃었습니다. 초록빛 풀과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죠. 말에서 내려 자신의 집으로 달려가자 집은 폐가가 되어있었습니다. 부모님도 형제도 하다못해 노비도 없었죠.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새하얀 나무들 사이에 인자하게 앉아있는 누이였습니다. 새하얗고 고운 머리칼을 지니고 있는 누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어서오세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오라버니.”
“너는 내 누이가 아니다.”
“이리 단호하게 말씀하시니 서운하네요. 식사까지 준비해왔는데 말이죠.”
식사라는 말과 동시에 문이 쾅하며 닫힌 채 잠겼습니다.
“?!”
“식사는 하고 가셔요. 오라버니.”
그러면서 누이는 붉은 스프를 그릇에 담아왔습니다. 상 위에 올려진 붉은 스프에는 눈알들이 동동 떠다니며 하얀 공간에 이질감을 더해주고 있었죠. 헛구역질을 한 비비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누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오라버니께선 영웅이 되고 싶으셨겠지요… 아버지께서 저를 금이야 옥이야 키우지 않으셨다면 오라버니의 말을 믿으셨을지도 몰라요"
비비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런 비비의 모습을 보고 누이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아아… 가엽게도 그들은 그 누구보다 진실을 강구했지만 그 누구보다 진실을 부정했지요."
"네가 홀리지만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과연 그럴까요? 그리고 오라버니께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으신가요? 오라버니는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내..내가 언제!!”
블랙 보이는 꽁꽁 숨겨왔던 속마음을 들킨 것 마냥 굴었습니다. 그런 비비를 본 누이는 얼굴이 여러 개의 검은 눈으로 뒤덮힌 채 천천히 비비를 향해 다가왔죠.
“그렇다면 왜 오라버니는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셨나요.”
비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 억울함, 원통함 그리고 그들을 향한 증오심. 비비는 어쩌면 자신이 정말로 누이의 아니 저 요괴의 말대로 자신이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원했을지도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습니다. 소중한 가족이자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그걸 원할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라버니는 그들을 구하지 못한 게 아니랍니다. 구하지 않았던 것이죠.”
“아니야… 그럴리가…”
누이는 주저 앉아 벌벌 떨고 있는 비비를 살짝 감싸며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저는 오라버니를 긍정한답니다. 당신을 이해해요. 그들은 죽어도 괜찮았어요. 죽음은 진실을 거부한 대가였지요.”
그렇게 말하며 누이의 손이 점점 비비의 눈으로 향할 때 비비의 머릿속에 어떤 말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이 호리병들이 당신을 도와줄 겁니다.’
비비는 누이를 밀치며 흰 색 호리병을 열어서 던졌습니다. 호리병에서 나온 빛은 누이를 겉돌다 한순간에 흡수되었죠. 그리고 나선 누이는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역시 오라버니는 저를 위해 돌아오신 거군요! 제 저주를 이리 쉽게 풀어주시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한 비비는 붉은 호리병을 열어 던졌습니다. 그러자 호리병에서 나온 붉은 실들이 비비를 묶어버렸습니다.
“윽…! 이게 무슨…?!”
“아아… 오라버니는 정말 순진하시군요. 정말 그 자가 진짜 도사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비비는 피가 차게 식는 것을 느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왜 어째서 어떻게… 누이는 조용히 비비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저의 정체를 알려주신 분을 살려줄 수 있을 리가요. 후후…”
비비는 너무 비참해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결국 가족을 살리지 못한 죄인이자 이들에게 속은 어리석은 자였으니까요.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누이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자신은 진짜 도사에 의해 이곳에 묶여있는 자 였으며 방금 그 흰 호리병으로 풀려났고, 마지막 한 인간의 영혼만 먹으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요.
“이제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바로 오라버니 당신이죠. 정말 감사해요. 제 발로 이리 찾아와주셔서… 저의 마지막 식사를 도와주셔서…”
후기:
꺄아아!! 처음 해보는 합작이네요!
사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참가할지 말지 고민 엄청 되는데 막상 다 끝내니 참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아요! 합작 주최해주신 스님께 감사합니다!
은검돌
@eun_gumdol